[중앙일보, 2023년 12월 5일] PERI 비상근연구위원 (안동현 / 거시경제·금융)
[안동현의 이코노믹스] 재정확장에 물가 뛰고, 통화 팽창에 자산 폭등 후유증 심각
코로나가 남긴 상흔, 인플레이션과 빚더미
올해 초 중국 정부의 격리해제 조치로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글로벌 사태는 일단락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코로나가 할퀴고 간 상처는 아직도 여기저기에 현재진행형으로 남아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하고 미·중 갈등이 심화하면서 미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가 경기침체와 인플레이션이라는 이중고에서 허덕이고 있다.
재부각된 ‘재정적 물가이론’
코로나와 관련되어 올해 거시경제 분야에서 부상한 가장 중요한 화두 중 하나는 ‘재정적 물가이론 (Fiscal Theory of the Price Level)’이다. 재정적 물가이론은 정부의 실질 부채(정부부채/물가수준)가 향후 재정 흑자의 현재가치와 동일해야 한다는 정부예산 제약식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미래 재정 흑자의 현재가치는 외생적으로 결정되며 그런 만큼 국가부채가 증가하면 물가도 비례해 증가한다는 논리다. 쉽게 말해 인플레이션은 통화량보다는 오히려 국가부채가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프린스턴대의 크리스토퍼 심스를 비롯해 컬럼비아대의 마이클 우드포드와 같은 일련의 유명 경제학자들이 1990년대 초반 제기한 이론이다.
그러나 이론의 우수성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이 이론의 타당성에 대한 실증검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밀턴 프리드먼의 “인플레이션은 언제 어디서나 화폐적 현상이다”라는 통화론적 견해가 주류였던 데다 무엇보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주요국에서 인플레이션이 안정적이었기 때문에 관심에서 멀어진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를 기점으로 대부분의 국가에서 심각한 인플레이션 현상이 나타나면서 인플레이션이 다시 경제적 이슈로 부상하게 되자 새롭게 조명을 받게 됐다. 올해 시카고 대학의 존 코크래인 교수가 이 이론의 핵심을 다시 정리하고 현실적으로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다는 것을 주장한 후 저명 거시경제학자 로버트 배로와 프랜시스코 비앙키 교수가 이 이론을 본격적으로 실증 검증한 논문을 지난달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대부분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에서 2019년 이후 발생한 인플레이션은 재정확장이 주요 원인이었고, 이러한 결과는 우크라이나 사태를 고려해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그림 1〉은 재정지출이 높았던 국가에서 인플레이션이 더 높았음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이에 따라 재정적 물가이론이 적어도 코로나와 같은 극단적 상황에서는 타당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OECD는 최근 경제예측에서 글로벌 경제 성장률이 올해 3%에서 내년 2.7%로 소폭 하락하고, 미국의 성장률은 2.2%에서 1.3%로 상당폭 축소될 것으로 예상했다. 인플레이션에 맞선 미 연방준비제도(Fed)의 고금리 정책의 여파가 내년까지 지속한다는 얘기다. 다만 이로 인해 내년 대부분의 국가에서 인플레이션은 코로나 이전 상황으로 회귀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코로나가 할퀴고 지나간 상처인 인플레이션은 아직도 치유되지 않고 현재진행형 상태에 있다.
사상 최초 0%대 금리의 부작용
코로나가 남긴 상처는 인플레이션만이 아니다. 부채도 그중 하나다. 한 나라 경제를 구성하는 세 주체인 정부, 기업 그리고 가계 모두가 부채에 허덕이고 있다. 그야말로 ‘여기도 빚, 저기도 빚, 빚이 판치는 사회’다. 코로나에 대응하기 위해 펼친 초저금리 정책의 후유증이다. 한국의 경우 기준금리를 코로나 이전 2018년 11월 1.75%에서 2020년 5월 0.5%까지 인하했다. 1999년 기준금리 제도가 도입된 이후 최초로 1%대 이하까지 금리가 낮아진 것이다.
초저금리 정책은 심각한 부작용을 동반한다. 인플레이션과 자산 가격 앙등이 그것이다. 과거 198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과도한 통화팽창은 주로 인플레이션을 야기한다고 여겨졌다. 그런데 2008년 금융위기에서 보듯 통화팽창은 물가상승을 유발하는 것보다 오히려 자산가격 급등을 초래했다. 왜 그럴까? 포트폴리오 효과가 소비 대체 효과를 압도하기 때문이다. 특히 부의 배분 악화와 고령화 가속화로 포트폴리오 효과가 더 중요하게 되면서 통화팽창이 소비를 진작시키기보다는 위험자산 투자를 더 자극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부유층·고령층, 위험자산 공격적 투자
일반적으로 금리를 낮추면 미래의 소비를 현재의 소비로 전환하는 ‘동태적 소비 대체’ 현상이 일어나게 되어 현재 소비가 진작된다. 이러한 소비 진작이 과도하게 되면 인플레이션을 유발하게 된다. 그런데 금리가 낮아지면 경제 주체들은 자산 포트폴리오 역시 재구성하게 된다. 자산의 위험 프리미엄이 증가하면서 예금이나 국채와 같은 무위험자산을 줄이고 주식이나 부동산과 같은 위험자산 보유를 늘리는 포트폴리오 변경 효과가 일어나게 된다. 부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부유층의 경우 소비로부터 얻는 한계효용이 낮아 소비를 늘리는 데 한계가 있다.
따라서 부유층이 위험 자산의 투자를 늘리는 포트폴리오 효과가 더 자극되게 된다. 또한 노동소득이 없는 고령층에선 이자소득 감소를 메꾸기 위해 자본 자산 투자를 늘릴 수밖에 없다. 결국 과거보다 부의 분배가 악화하고, 또 고령층 비중이 커진 사회에서는 상대적으로 포트폴리오 효과가 소비 대체효과보다 커지게 됨으로서 위험자산에 대한 공격적 투자가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위험자산 투자는 자산 가격의 상승을 불러오고, 이는 중산층이나 서민층까지 모두 투자에 나서게 하는 밴드웨건 효과를 가져와 투기 현상을 불러일으킨다.
주목할 점은 금리 인하가 부채 총량을 늘리는 정도가 과거보다 훨씬 커졌다는 점과 국가마다 위험자산 선호도가 상이해 부채가 늘어나는 정도가 차별화된다는 점이다. 차입 용도가 소비 대체를 위한 것이라면 차입 금액 총량이 그리 크진 않다. 더구나 전통적으로 빚을 지는 데 부담을 느끼는 우리 국민은 생계 목적의 차입 요인이 크지 않기 때문에 차입액 자체가 상대적으로 작다. 따라서 금리 인하에 따른 인플레이션 유발 정도가 그리 크지 않다.
한국 가계부채 이미 GDP 초과
그런데 위험자산 투자는 얘기가 다르다. 주식은 비교적 소액을 투자하지만, 워낙 큰 금액을 필요로 하는 부동산은 차입금액이 많아 결과적으로 가계부채 총량이 커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시계열적으로 보면 과거보다 금리를 인하할 경우 부채가 늘어나는 증가량이 많을 수밖에 없다. 더구나 주식보다 부동산 투자를 선호하는 우리나라에서는 부채 증가량이 더 높아진다는 얘기가 된다. 이렇게 급증한 가계부채는 현재와 같이 고금리로 전환될 경우 가계부도 위험을 증가시킬 뿐 아니라 이자 부담에다 자산가격 침체로 인한 ‘자산효과(wealth effect)’까지 더함으로써 소비 위축과 거시경제 리스크 증대까지 초래한다. 우리나라는 가계부채 증가 속도가 세계에서 가장 빠른데(표 참조), 전세라는 우리 고유의 그림자 금융을 포함할 경우 수치는 훨씬 더 높을 것이다.
2023년에 우리나라 가계부채는 1700조원에 이르며 이미 GDP를 초과했다. 가계대출의 상당 부분은 주택담보대출이다. 급격한 금리 인상에 따라서 가계가 부담해야 하는 이자비용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가구 중 이자지출이 소득의 10% 이상을 차지하는 비율이 20%에 가까워지고 있다.
특히 우려되는 부분은 〈그림 2〉에서 보듯 ‘영끌’에 나섰던 20대에서 연체율이 급등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들은 부동산 가격 급등시 막차를 탄 만큼, 그리고 가격 하락 폭이 상대적으로 큰 물건에 투자한 만큼 가격 손실에 이자 부담이란 이중고에 시달리는 양상이다.
소규모 개방경제의 통화정책 난점
종합하면 코로나가 우리에게 준 교훈은 다음과 같다.
재정지출 확장책은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가능성이 커지는 만큼 신중할 필요가 있다. 또한 유사시 재정확장책을 쓰기 위해서는 평상시 재정 건전성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반면 통화 팽창정책은 인플레이션보다는 자산 가격 폭등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크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자산 포트폴리오 구성에서 부동산을 선호하는 국가일수록 가계부채가 급증할 가능성이 높은 만큼 저금리 정책에 보다 신중할 필요성이 있다.
결과적으로 부채 총량이 커진 만큼 같은 속도로 금리를 올리더라도 가계는 보다 심각한 충격을 받게 된다. 특히 소규모 개방경제로 통화정책의 독립성이 제한된 우리나라에서는 미국이 금리를 올릴 때 국내 상황에 따라 금리를 조절하는 데 한계가 있는 만큼 금리 하한선을 상대적으로 높게 설정해 금리 상한선과의 차이를 다른 나라에 비해 작게 가져가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2023년 12월 5일
<안동현, PERI 비상근 연구위원>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